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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DLOW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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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 '글을 시작하면서"
작성자 김호수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5-02-02 19: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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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822

{문득 한국당구의 현실과 타개책 대해서 약간은 쓰고 싶었다.

  나이먹기 전에, 그간 지녀왔던 당구와 당구계에 대한 열정이 언제 사라질 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도 생겨나,

 뭐랄까, 편하게 풀어놓아도 대부분의 동호인들은 이해들하지 않을까, 그런 맘이 들었다.

 최근 대찔레님의 카페연재소설 '바람장미' 보면서, 약간 감염이 된것같기도 하다.

 

 그래서 어제 우리 카페 자유게시판에 감히 '한국당구의 성장과 쇠퇴' #1 올려놓고나서

 이거 만만찮은 일을 저질렀구나 후회하기 시작하는데, 우리 카페의 실레노스님 이하

 열성회원 몇분이 퇴로를 막아버렸다.

 이미 길에 들어섰으니 어떡하냐, 힘겨운 한계를 들어낼 일이지만 쓰기로 했다.}

 

읽는 분들에게는 미리 몇가지 말씀드려 놓아야 오해가 없을듯 하다.

 

1. 쓰는 사람은, 68년도에 절친 친구 집에 당구대가 있어 처음 당구(4) 접했고,

    고등학교까지 군사정권에 의한 장기간 휴교령으로 말에는 단기간에 300

    수준 (지금 돌이켜보니 진짜 엉터리 당구였다) 갔었던 같다.

    재수하면서 당시 종로통의 학원근처 당구장에서 가끔 쳤지만, 동네 당구장의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게임비도 부담스러워 당구를 멀리할 밖에 없었다.

 

 71년에 대학에 입학했지만 다른 분야에 흥미들을 느꼈고, 대학입학후 당구를 시작한

    동기들은 내가 큐잡고 들어 오는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아서 자연 당구와 멀어졌다.

    그러나 당시 윤춘식 (재일교포 당구선수)씨가 지도편달차 한국에서 시범경기등을

    하는정도는 알고 있었고, 당시만해도 한국당구가 세계수준과는 제법 차이가 있는것같다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선친께서 (옛날 300 고수-본인주장^^) 휴일이면

    돈암동 동도극장 당구장에서 사셨는데 점심,저녁 식사하러 오시라는 어머니의 전갈을

    위해 어린 내가 아버지가 오시거나  입막음 뒷돈 주실때까지 번씩이나 가야만 했다.

    그런데 어린  눈에 남아있던 당시의 당구장 풍경은 내가 재수 시절 종로통에서 보았던

    당구장들의 풍경보다 훨씬 품격이 있었던것으로, 아직껏 아버지의 모습과 같이 뇌리에

    시리게 남아있다.

 

2. 대학 졸업후 군복무, 취직, 결혼등으로 자연히 아주 가끔 동료들과 회식 2차맥주내기

    당구이외에는, 98년에 우연히 당구를 본격적으로 접하기전까지, 본격적으로 당구를 접해볼

    기회라곤 전혀 없었다.

   

    83년부터 5년간 내가 30년간 봉직한 회사의 미국주재원으로 근무했는데, 미국 LA에서

    현지 미국인 직원들과 포켓볼을 회사근처 bar 에서 가끔 쳐볼 기회들은 있었다.

    포켓볼 룰도 모르는 사람이 자기네 상상을 초월하는 끌어치기,밀어치기,컴비네이션으로

    괴상한 포케팅을 성공시키자 경악들하는 모습이 지금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하루는 진로가 막혀있는 공을 고민끝에 마쎄로 성공시키자, bar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쳐준 영광스런 기억도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84 디트로이트로 근무지를 옮긴후, 기나긴 겨울에 그곳에서 만난 교민 친구들과

    전화번호부에서 찾아내고 30분간 운전해서 찾아간 당구장에서 85년에 처음으로

    국제식 대대라고 부르는 테이블을 처음 보았다.

    당시엔 그저 미국사람들이 키가 커서 테이블이 크고, 미제 테이블이라 구르는 줄로

    생각했고, 개인큐 없이 나타난 동양인 4명을 이상하게 쳐다보다 진짜 막큐 3자루를 어디서

    갖고와서 무례하게 건네주는 당구장 주인과 서로 뻘쭘하게 노려보는 시튜에이션도 지금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 얘기는 장황하지만 나중에 내가 얘기의 주제들과도 관계가 있다)

 

87 귀국한 , 세월은 역동적으로 흘러갔다.

    98 당시 올림픽공원  올림픽파크호텔에서 모처럼 개최된 UMB-BWA

    월드컵 경기를 MBC에서 선전 중계방송예고 하는걸보고, 마침 장소가 사무실 근처이고

    집에서도 멀지않아,몇몇 당구에 관심있던 동료들을 꾀어(당시의  상관들은 우리가 거래처

    방문차 외출한걸로 지금도 알고 있을꺼다 ^^) 구경을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이상천 선수, 브롬달,야스퍼스 말로는 들어본 세계적 선수들을 직접보고,

    경기를 관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래인 당시 국내정상급 선수이자 유일한 BWA 소속 한국선수인 김철민 선수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었다.

    당시 진행부와 브롬달 외국선수들간에 언어장벽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다가

    안타까운 맘에 몇마디 통역을 해준 계기로, 김철민씨와 오랜 인연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당시 시합장 밖에서는 대부분의 당시 당구연맹 소속선수들이 시합에는

    참여하지 않고, 단체로 데모를 하고있어 무슨 일인가 관심을 갖게 됬는데,

    그것이 오늘까지 내가 다시 당구도 치게되고, 당구연맹관련일에 잠시 발을 들여놓게

    사단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 누군가 '역사는 인연이 영역' 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너무 길어져서 '글을 시작하면서' 오늘#2 마무리를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 풀어나갈 얘기들과 직간접 관계가 있어 맥락은 마무리짓겠다.

   

     시작전에 전제가 자꾸 이렇게 길어지는것을 보니 나이가 것이다.

     이렇게 빨리 시간이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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