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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 이야기 1
작성자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1-02-14 11:0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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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578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1


 


한국 당구계 최초로 '명인' 칭호를 받으셨던 고 조동성님께서 한국 당구사를 돌아보시며 쓰신 글입니다.

www.billiardkorea.co.kr

 

순종임금의 건강생활 유지 위해 들여온 '옥돌대'  

 


중세 이래 유럽 귀족사회의 최고 사교놀이었던 당구가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옮겨졌는가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우리 당구사의 유일한 기록은 이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純宗)의 장례를 치르면서 펴낸 「순종국장록」이 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대략 구한말 1909년을 전후해 궁중의 어전놀이로서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 창덕궁 동행각에 설치된 2대의 옥돌대
이 국장록은 책 이름이 말해 주듯이 순종임금의 장례의식을 주로 담았지만 의외로 당시 풍물을 곁들였는데, 특히 재위 중의 황실 내면사를 사진과 그림으로 수록했으며 황제의 일상생활면을 가식 없이 기록, 정통 실록과는 다른 궁중 풍정을 전한다.

이 책의 18페이지에 생시 그가 즐겼던 어용 당구대(2대)와 상아공, 큐대가 화려한 내실을 배경하여 사진으로 소개돼 있고 장소는 창덕궁 동행각이라고 나와 있다. 더욱 85페이지에는「운동의 필요로 옥돌(玉突)」이라는 제목 아래 순종 나라님의 옥돌 인연과 평소 즐기심이 간략하게 설명돼 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기면 「…창덕궁 인정잔 동행각에 옥돌대(당구대) 2대가 들여 있으니 간간 시신(侍臣)을 데리고 큐를 잡으셨다. 내외국의 옥돌선수가 경성(京城)에 이르기만 하면 반드시 한번씩은 인견하옵셨다.
옥돌의 적수 되는 사람은 전 창덕궁 경찰서장 야노(矢野)인데 결코 이기시려는 욕심이 없으셨고 항상 어찌하면 재미있게 마치실까 하시는 고아하옵신 생각으로 옥돌판을 대하옵시는 터이나 실력은 60∼70 내외까지 이르셨다.…(후략)」
참고로 그 당시 이 점수는 현재의 150∼200점대로 비교적 고점자 수준이었다고 보겠다.

사진과 원로인을 통한 내 나름의 판단은 당시 게임 방법은 정통의 4구치기였으며 당구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대, 공은 당연히 상아공이었고 직경이 지금의 65.5mm보다 약간 큰 69mm였다. 그러나 이상은 기록상의 추적이고 그것도 궁중내이고 보니 보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 초창기를 살았던 한 사람의 당구인이 있어 그의 기억이 얼마간 세월을 거슬러오를 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원로 당구인 김효근(金孝根)씨.
그 시대 당구인이 옥돌을 가까이 했던 몇 안되는 한국인 중의 한 분이며 후일 우리 당구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었다.
그러나 이분 역시 궁중 출입자는 아니었고 그의 스승인 전상운(全相雲)씨가 어용 당구대의 시설관리자 겸 순종임금의 개인적 당구교수였던 데서 이 스승의 입을 통해 궁중옥돌장의 풍경을 전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순종은 외모로 보아선 흠잡을 데 없이 훤칠한 장부였으나 선천적인 체질은 매우 섬약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가 당구를 즐기게 된 것은 총독부의 배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건강생활을  위한 실내 스포츠로서 가까이 한 것이었다.
전형적인 귀골풍의 온후관대한 성격이 강한 체력운동보다 이런 류의 가벼운 실내 게임에 어울렸다고 보겠다.
기록에도 말했듯이 그의 당구 자세는 전혀 승부욕이 없어 간혹 일인 고관들과 대결할라치면 측근들이 민망해 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너무 신사도에 철저해 그 고지식함이 당시 숨가쁜 국제정세에 비겨 약자의 연민인양 비쳐졌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반의 당구지식은 전혀 없었고 그보다는 당구를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최초의 일인 당구장인 「경성구락부」가  탄생한 것이 1920년대 초반이었다 남대문시장 입구의 여성회관 자리가 당시 재판소 관사였는데 일인 고급관리들의 집단거주지였다.
여기에 위치한 경성구락부당구장은 2층 목조 구조의 아담한 사교장이었다. 1층은 일반관리직용, 2층은 고관들의 전용 당구장으로 각각 3대와 2대 모두 5대의 당구대가 설치됐었다.
일인 거주지역에 일인 경영의 시설이었던 만큼 대다수 고객이 일본인이었지만 간혹 조선총독부 직원들이 동행해 즐길 기회가 없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런 점에서 경성구락부는 우리 당구의 시발점이었다고 보겠다.
일단 당구장이 시중에 나타나고부터는 전파도 빨라 이곳 저곳에 차츰 시설이 불어났는데 1920년대 말까지 경성에만 약 10여개 소를 헤아렸다.
구체적으로는 서대문연초공장 휴게소에 1대, 의주로의 총독부 관사촌에 1대, 남산의 왜성대에 3대, 청량리의 서울의대 내 교직원용으로 1대 등이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그때까지만 해도 옥돌은 순수 친목·사교 목적의 레크리에이션이었고 지금처럼 영리상의 영업장은 아니었다.
또 고급관리들의 전용이다 보니 품격도 대단해 당구를 칠 수 있는 위치면 엘리트임을 자부할 수 있었다.

처음 궁내의 어용놀이로서, 다음은 일인들 중심의 고급 사교장 성격에서 자리잡기 시작한 당구대가 일반 보급을 위한 본격 영업장으로 나타난 것은 1923년 왜인촌 진고개(전 대연각호텔 뒤편)의 일인 경영 「파주정(波州亭)」이  효시였다.
그러나 시설은 빈약하기 짝이 없어 딱 한 대의 당구대가 상류층 아닌 서민층의 발걸음을 제한, 일인 그것도 일부 돈 많은 상인층에 국한됐다.


 

귀족풍에서 서민풍으로 옮겨 온 당구  

우리 당구가 황실의 궁중놀이로서 시작됐음은 그것이 정도(正道)의 출발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원래 빌리아드는 전통 신사도 정신의 실내 스포츠이다. 이 귀족형 사교정신이야말로 당구가 지닌 남다른 매력이자 근본 바탕이기도 하다.
지금의 현대 당구장에서 느껴지는 일부 지나친 유희성 내지 그릇된 사행성과는 전혀 격조를 달리했다.

이를 위해 잠시 빌리아드의 기원을 더듬어 보는 것도 좋겠다. 당구가 언제부터 생겨났는가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당구인은 물론이고 사학자들간에도 많은 설전을 벌였다. 혹자는 BC 6세기까지 거슬러올라 스키치아의 철학자 아나칼시스가 그리스를 여행했을 때 유사한 경기를 봤다는 기록을 남겨 그 기원을 어림잡는가 하면, 또다른 견해 중에는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시민경기에서 유래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설도 확실한 증빙자료가 없고 보니 모두 추측론에 불과하다. 뿐더러 이 같은 고대사회의 기원설에 대해 1885년 프랑스의 역사가 자크 본홈은 신랄한 풍자로서 그 허구성을 추궁해 항간을 웃기게 했다.
“만약 빌리아드가 로마 시대의 산물이라면 호레이스 같은 대시인이 이를 읊조리지 않았을리 없을 것이며, 이런 재미있는 게임이 있었다면 폭군 네로가 방화에서 즐거움을 찾았겠는가”
당구가 보다 스포츠로서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는 이처럼 그 근원이 모호한 점도 한 원인일 것이다.

또 다른 재미있는 사실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문명의 근원국과 이에 질세라 오리엔트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 등이 저마다 당구 발상지의 영광을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이 국가적 영광 다툼은 뚜렷한 역사적 근거가 나타나지 않아 아직까지 역시 안개속이다.
한때 어원적으로 ‘공’을  뜻하는 Bille라는 말을 문제해결의 열쇠라고 보아 라틴어의 발원을 열심히 탐색했지만 어학자들만 골탕 먹인 채 끝내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기원이 애매모호한 당구가 역사상의 확실한 문헌 속에 등장한 것은 16∼17세기 때였다.
1591년 에드먼드 스펜서의 저서에서 소개된 이래 1598년에 나온 문호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에서는 빌리아드 경기가 본격 인용됐고, 그 후 1637년 벤 존슨, 1755년 사무엘 존슨이 각각 사전 속에 ‘빌리아드’란  낱말을 정식으로 수록했다.
이 시기에서 당구가 상류 귀족사회의 절대 사랑을 받았음을 말해 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1576년 스코틀랜드의 메어리 여왕이 강금 당했을 때의 기록이다.
이때 여왕은 자신의 애용물이던 당구대가 철거된 것을 몹시 슬퍼해 측근에게 이를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쪽의 문헌에는 1694년 부르군디공(公의) 부인이 지금의 큐대와는 다소 모양이 다른 메이스로써 상아공을 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 전해진다. 그러나 전성기는 17세기 중반 이후 루이 14세 때로 보여진다. 당시 유럽 최고의 봉건군주였던 그는 절대 권력자답게 유흥면에서도 호화의 극치를 치달렸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그가 이 고급 놀이를 등한시할 리 없었을 것이며 거의 매일 만찬 후에는 귀족들과 어울려 큐대를 잡았다고 한다.
이상으로 미루어 당초부터 당구는 서민층보다 귀족의식에서 발전됐고 그런 기품이 당연히 지켜지는 데서 빌리아드의 아름다움이 깃든다. 유럽권의 영국, 프랑스 등 전통 빌리아드국들은 이런  점이 흔들림 없이 계승돼 오고 있는데 반해 우리의 대중성격 분위기는 다시 언급하겠지만 다분히 미국풍의 영향 탓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 상업당구장의 최초는 진고개거리의 일인 경영 「파주정」이 었으나 보다 일반보급의 선도역은 역시 일인 아하라(阿原捨次郞) 소유의 「志賀之家(지하지가)」구락부였다.
지금의 명동 2가 사보이호텔 부근에 자리했던 이 당구장은  「파주정」 보다 한발 늦게 개장했으나 시설(당구대 3대)이나 분위기 면에서 훨씬 서민적이었고 한국인들의 출입도 많은 편이었다고 한다.
이는 경영주인 아하라가 지식층 출신에 인간미도 풍부해 친근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인데 그는 8.15 해방까지 경성당구조합장으로 이 땅의 당구 보급에 또 다른 견인차였다.
이 밖에 순전히 일인들만의 출입장으로서 현 신세계백화점 뒤쪽에 「아사히(旭)」구락부가 있었고 「파주정」「지하지가」와  함께 이들 세 당구장이 1920년대 초엽 초창기 당구를 엮었던 일선현장들이었다. 이때만 해도 영업장보다 순수사교장 성격이 짙었고 한국인들의 출입도 극소수 특권층이나 일부 신식 교육층에 국한됐었다.

간간이 종로통의 유명 포목점 양복점 요식업장 등 호상(豪商)들이 끼어들긴 했으나 별로 환영받는 고객이 못됐다니 당시 당구장의 품격을 짐작할 수 있겠다.
정확하진 않으나 이때 초창기의 요금은 한 사람당 5전 정도였고 화폐가치로는 1전이면 성냥 3갑이나 굵은 엿 한 가락을 살 수 있었다니 상당히 비싼 폭이었다고 하겠다. 지금과 다른 점 가운데는 당구대마다 15세 전후의 소년이 붙어 게임 보기와 점수기록을 전담했으며 요금 계산식도 승자만을 제외하고 게임 참가자 전원이 균등 지불하게 돼 있었다.

첨부파일 view_24.jpg , joo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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