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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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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 이야기 2
작성자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1-02-18 17:5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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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215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2


첫 영업장은 임정호가 개업한 「무궁헌」  

처음 궁궐내 어용놀이로서, 다음 일본인들의 사교구락부로 소개되기 시작한 당구대가 우리네 영업장으로 나타나기는 1924년 와세다 대학 출신의 인텔리겐차 임정호(林政鎬)씨가 현 조흥은행 맞은편 광교통거리에 세운 「무궁헌(無窮軒)」당구장이었다.

이 한국 최초의 우리 당구장은 허름한 목조 건물 2층에 당구대 2대의 빈약한 시설이었지만 기품과 격조에선 그때까지의 일인 당구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당시 식민 압제하의 억눌린 민족감정은 무엇 하나 왜놈들에게 처질 수가 없었고 이런 경쟁의식은 일종의 반항 컴플렉스였다고도 하겠다.

우선 「무궁헌」이란 이름부터 나라꽃을 상징해 자주의식을 담았던 것이다.
실제 이 「무궁헌」당구장은 암암리에 학생운동 연락처로서 이용됐다.
이미 말했듯이 초창기 당구인은 거의 모두가 상류층의 젊은 엘리트들이었고 당시 엘리트라면 전문학생이나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이 당구장을 비밀 아지트로 삼게 됐음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당구장은 위락시설인만큼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운데다 그만큼 당국의 감시도 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무궁헌」당구장에 자주 얼굴을 비쳤던 명사 중에는 윤치호, 유진오 두 분 선생도 끼어 있었다. 물론 당구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곳에 나타나는 동창이나 선후배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사실이 들통나서 연락책이었던 김효근씨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약 2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맘때쯤 서울에만 국한돼 그 숫자도 한두 개를 헤아리던 순수 우리 당구장이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무궁헌」당구장이 개장된 지 1년 후인 1925년께부터였다. 주로 종로1, 2가를 중심으로 인사동, 낙원동 일대가 본거지를 이뤘는데 동아(2대) 중앙(4대) 테이라(1대) 등이 선두 그룹이었다.

특기할 사실은 포켓 당구대가 동아에 맨처음 설치돼 인기를 모았던 점이다. 차츰 상업당구장이 안착됨에 따라 고객층도 다양화를 보여 사각모의 최고 지식층 외에도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체 등 호상(豪商)들과 일제하 작위 집안의 귀족 자제들도 어울렸는데 이색 인물 중에는 이완용과 박영효의 손자도 끼어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두 귀공자는 실력도 만만치않아 1백 50점대의 고점자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구한말 역사에 오점을 찍은 장본인으로 이른바‘을사오적(乙巳五賊)’의 으뜸 인물이다. 그의 후손이라면 상당한 저항감을 불러일으킬 만한데도 당자의 인품이 이를 용훼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고 오히려 그 세련된 매너가 주위의 선망을 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초기 보급단계 우리 당구장을 즐겨 찾고 게임 품격을 높였던 선배 당구인들의 모습을 꼽아 보면, 우선 당구가족이었던 음악가 홍난파씨 일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난파 선생은 종로3가에서 바이얼린 강습소를 열고 있었고 그 옆에 종로당구장이 자리해 퇴근 후면 대포집을 찾기에 앞서 먼저 큐대부터 잡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고 한다.
선생의 당구 실력은 1백 20점(오늘날의 300점대)으로 적수가 흔치 않았다고. 그런데 친조카인 두 형제가 그에 못지않은 당구팬들이었다. 이분들은 모두 의사로서 형 재유씨는 안과, 동생 사유씨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그 이후 재유씨가 제천에 옮겨 감으로써 형제가 떨어졌으나 당시는 모두 종로통의 명문 개업의였다. 숙부인 난파선생을 필두로 형제분이 똑같이 당구에 심취해 그야말로 당구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재유씨는 셋 중에서도 가장 열성파였던 것 같다. 얼마나 당구를 좋아했던지 아예 당구장에 살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간호원이 달려와 밀쳐내야만 마지못해 큐대를 놓았다고 한다.

원로 영화감독 안종화씨와 그 시대의 최고 스크린 액터 나운규씨도 빼지 못할 당구인으로 실력은 각각 60점(현 2백점)과 40점의 보통 수준이었다. 특히 나운규씨는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당구대에서도 시종 침묵 일색이어서 그와 한번 상대한 사람은 그 엄숙함에 질려 다시 어울리기를 기피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저명 당구인과는 달리 순수 당구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고점자들로는 서정원·김효근씨 등이 있었고 이들의 점수는 3백점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점이었다.
참고로 이때 국내 최고점자는 후구도꾸(福德) 무진회사 사원이던 일본인 다까끼(高木)로 그의 점수는 5백점이었다.

또 다른 고점자를 몇 사람 소개한다면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씨와 명월관 대표 이시우씨로 이들은 어떤 면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 당구 발전의 간접 지원자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월등한 데서 이 고급 사교장의 재정적 후원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월관 대표 이시우씨의 당구 점수는 2백점대로 수준급 게임에는 으례 내기가 따르게 마련이고 이씨는 산해진미에다 기생까지 거느리고 보니 풍류한량들에게는 안성맞춤의 내기 상대였다. 여기에다 이씨 자신도 놀이판의 낭만이라면 녹록지 않은 품성이라 당구장 내의 그의 인기는 불문가지. 한판 승부에 명월관 파티로 이어졌음도 흔히 있는 일이었을 테니 그의 호방함이 이를 물리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기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간에 그는 이 선심 파티를 즐겨 감수했다는 얘기다.  


 

1930년대엔 당구장은 전국으로 확산돼  

일제하에서 그들로부터 소개됐던 당구가 상류사회의 지식인층을 거쳐 급속도로 번져 가게 된 데는 당시 시대적 배경도 큰 원인이었다.
사람은 기본 의·식·주 외에도 생활의 윤활제로서 여흥, 즉 레크리에이션이 필요하다. 특히 그 시절은 주권을 탈취당했던 속민의 슬픔 속에 압제의 사슬까지 있고 보면 그 스트레스 강도는 극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욕구불만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문화시설은 거의 전무 상태나 다름 없었다. 기껏해서 동양극장의 눈물짜기 신파 연극이나, 이따금 찾아오는 곡마단의 재주 묘기 정도가 최고의 대중 오락이었다.
그러나 이런 공연장은 엄연히 주객이 따로 있어서 그야말로 구경일 뿐 직접 참여할 수는 없고 보니 호사꾼들에겐 한 말로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당시 부유층 사회에서 마작이 대유행을 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비록 안방놀음이긴 하나 스스로 참여하는 게임인데다 그 나름의 두뇌 회전이 주체성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때에 당구의 출현은 안성맞춤의 쾌재였고 요즘 말로 화끈한 자극제였다.
게임의 건전성 외에도 고귀한 상아공을 굴린다는 멋까지 깃든데다 그 청아한 탁음은 고달픈 당시의 파열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학자·의사·예술가를 망라해 이른바 명사들이 주저없이 큐를 잡았는가 하면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 한량들도 이에 질세라 다투어 당구장을 찾았던 것이다.

1920년대 말께를 고비로 급작히 불어난 대중 당구장은 이윽고 30년대에 접어들자 본거지 종로통을 벗어나 4대문 쪽을 향해 곧장 세력을 펼쳐 갔고 그때까지 장안에만 국한됐던 것이 지방으로 전파됐다.
경성과 가장 가깝고 일인 왕래가 잦은 인천을 스타트로 항도 부산-대구-대전-청주-광주 등으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 시기가 우리 당구사에선 가장 모범적인 한 세대였다.
스포츠로서 본연의 당구정신이 충만했으며 지도급 당구인들도 선도자로서 사명감을 다했던 시기였다.
이 30년대 초엽의 서울시내 이름난 당구장 몇 개를 꼽아 보면 한국인 경영 당구장으로는 반도구락부(당구장), 홍등, 자연장, 대경 등이고 진고개 일대의 일인 소유로는 낭화헌, 일승정, 어성, 기린, 동지 등으로 모두 20여 개소를 헤아렸다.
이들은 제각기 독특한 개성으로 단골 고객과 계층을 달리했는데, 우선 반도구락부는 영리보다 친목 클럽 성격에서 순수성이 빛났고 따라서 지식인 명사들이 주멤버였다.
홍등은 간판이 말하듯 다분히 유락장 분위기가 짙었는데 지금의 서린호텔 부근에 자리했으며 그 일대 다동, 서린동 등은 고급 요정들의 집결지구였고 따라서 화류가를 무대로 한 건달패들이 많이 출입했다.

대경은 그 주인의 명성이 오히려 더 높았던 당구장. 이 곳의 경영주인 임명선씨는 그 시대를 떨치던 쾌남아로 원래는 화가였으나 나중에 영화계로 진출해 상업미술 분야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서대문 근처 동양극장 맞은편에 있었던 자연장당구장은 그 당시 연예인들의 전용무대로 김승호, 남인수 등 연기자와 가수들의 공연시간 대기장소였다.
일인 당구장도 제각기 특색을 지니기는 마찬가지여서 일승정과 어성은 한국내 당구재료판매상들로 당구장 경영은 일종의 선전 창구였다.
따라서 한국의 당구 영업장들과 관계를 가졌고 거래상 한국인들의 출입이 많다 보니 사원 중에는 한국인도 많았는데 원로 당구인 박수복씨가 이 기업 당구장 출신이다.
명동2가 유네스코 자리에 위치했던 동지구락부는 일인촌의 최고 사교장으로 고점자들이 많이 애용했었다.
당시 국내 최고점자였던 다까끼(高木·5백점)와 변호사 하라(原·3백점)가 이 당구장의 양대 산맥이었다. 이들이 큐를 잡으면 이미 치고 있던 고객들도 일제히 게임을 중단한 채 관전에 몰두했었다고 한다.

당구장 분위기면에서 한국과 일인 영업장은 다소 차이가 있었다.
당시 영업장은 대다수가 목조 건물로 똑같이 마루바닥이었으나 한국 쪽은 구두를 신은 채 출입한데 반해 일본인들은 실내화로 갈아신고 게임에 임했다.
이는 평소 양국민간의 관습상 차이겠으나 흙발보다는 구두를 벗는 쪽이 훨씬 깨끗하고 기품을 지녔다고 하겠다.
또 다른 상이점은 일인 당구장에선 게임 카운터로 미동(美童)을 고용한데 반해 한국 쪽은 16∼18세의 여자 계산원을 둬 당구장 내를 한층 부드럽게 했 다. 양가락 머리형에 복장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여기다 버선발 고무신 차림은 이후 양장차림 ‘신식여자’의 첫 단계였던 것 같다.

이 당시 당구요금은 처음 7전보다 1전이 더 올라 8전. 요금 지불 방식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다. 한마디로 말해서 시계가 필요없는 게임당 공동지불 방식이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4인 이내일 경우 7큐 내에 자기 점수를 완전히 쳤을 때 승자 한 사람을 제외하곤 나머지가 모두 똑같이 게임료를 내야 했다. 만약 5명 이상일 경우는 역시 7큐 내에 자기 점수를 치되 80%만 치면 완전히 자기 점수를 소화한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 때도 승자 한 사람만 그냥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등수에 관계없이 규정된 게임료를 물어야 했다. 지금의 꼴지 한 사람에게만 부담시키는 요금 지불과는 엄청난 차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점자가 하점자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형태의 현재 방식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된다. 게임은 스스로 즐겨서 참여하는 것이니 마땅히 게임료도 스스로 즐긴 만큼 지불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지금처럼 남의 돈으로 즐거움을 사는 방식은 민주적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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