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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 이야기 3
작성자 관리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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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1-02-19 11: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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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689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3


일본 가쓰라 자매 묘기시범 장안의 화제  

1930년대부터 우리 당구계가 본격 개화기에 들었는데 바로 이 해 벽두에 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일본의 당구명문 가쓰라가(家) 자매의 내한 시범경기였다. 이들의 한국 방문은 단순한 친선 목적 이상으로 이 땅 당구 보급의 일대 기폭제였고 또 외국 당구인으로서는 첫 손님인데다 남성 아닌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시대의 센세이션이 됐다.
이 여류 당구인은 언니 가쓰라 마사꼬(桂正子·당시 21세)와 동생 노리꼬(典子·18세)로 형부인 고오바시(高橋)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와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두 자매 당구인의 직접적인 내한 이유는 당시 경성에 있던 일인 경영 일승정당구장이 일본의 유명 당구대 메이커 스가누마(管沼) 제작회사의 국내 판매망이었고 따라서 이들의 묘기시범을 통한 사세 확장이 우선적인 노림이었으나 이런 상술 목적 이상으로 스포츠 당구의 전통 진수를 보여 준 쾌거였다.
두 여류의 실력은 당시 일본내 최고봉. 그러나 이런 실력보다는 당구명가로서 가쓰라 집안의 명성이 오히려 더 높았다. 이 가쓰라가가 언제부터 당구를 계승해 온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여하튼 수대에 걸쳐 당구명가로서 이름을 떨쳐 왔고 이 명가를 기린 「가쓰라배 쟁탈전」은 오늘날에도 일본 아마추어 당구계의 최고 권위 대회가 되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도쿄역 앞의 옛 본거지이던 가쓰라구락부가 지금은 종합 레크리에이션 클럽으로 현대화됐지만 여전히 전통 당구장의 명성을 자부하고 있다.
또 그 당시 두 처제를 인솔했던 고오바시씨는 한때 일본빌리아드협회의 이사로서 집안의 뼈대를 그대로 지켜 왔다.

여기서 두 자매 당구가족의 면모를 잠시 소개하면 언니인 마사꼬는 훗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신의 대관식에 초청했을 만큼 세계적 명사가 됐으며 그때 모인 각국 선수들과의 친선경기에서 당당히 우승함으로써 일본 여성의 미와 기(技)를 한꺼번에 떨치게 되었다. 1940년에는 1만점을 한 큐에 끝낸 최초의 기록 보유자가 됐고, 이때 게임 소요시간은 2시간 40분으로 이 역시 기록적이었다. 이 외에도 일본 대표로서 세계 3쿠션 선수권 대회를 3차례씩이나 석권한 바 있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는 언젠가 미국에서의 경기에서 미국 선수와 결승전 때였다. 자국 선수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연띤 분위기 속에서도 동양여인의 침착함을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게임을 리드해 나가자 참다 못한 한 열렬 청년이 「일본 여성에게 지는 것은 미국의 수치」라면서 일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동생 노리꼬도 실력면에서 언니와 한치 차 없는 맞수인데다 어린 귀여움에서 인기를 더했다. 전일본 선수권대회를 다년간 쟁패했으며 우리가 자랑하는 재일동포 당구왕 다까기(高木正治·한국명 尹春植)와도 1만점 게임 선수권을 번갈아 차지했을 정도다.

이들이 경성에서 가진 첫 번째 시범경기는 숙소였던 조선호텔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으나 당시 당구대 2대를 귀빈용으로 비치하고 있었다. 처음 마사꼬가 단큐에 1천 5백점을 친 다음 3쿠션 15점을 13큐에 쳐내자 이어 등장한 동생 노리꼬가 똑같이 단 한 큐로 1천 5백점을 치고 3쿠션은 10큐에 15점을 끝내 장내를 감탄시켰다.
이튿날은 장소를 옮겨 종로2가 중앙당구장에서 장안의 고점자들을 앞에 두고 묘기 중심으로 시범을 보였는데, 여기서도 두 자매는 1천 5백점과 3구식 3백점을 단번에 끝내 초창기 우리 당구인들의 넋을 빼놓았다.
세 번째 시범은 일반관중을 위해 을지로2가의 황금구락부에서 열렸는데 이들의 재기(才技)를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로 전차길이 완전히 막혔고 급기야는 기마경찰들이 동원되는 소동을 벌였다.

이날 마지막 시범이 끝나고 국일관이 초청한 자리에서 한정식의 맛갈에 매료당한 두 자매는 주방장을 따로 불러내 여성답게 조리법을 메모한 것도 당시 한량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언니 마사꼬는 태평양전쟁 후 미 육군중령과 열애 끝에 결혼,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그간 전아메리칸 보크라인 선수권대회에서 몇 차례나 우승했다.

1989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간의 아시안 3쿠션 선수권대회장에도 참관, 필자와 만난 노리꼬 여사는 오랜만의 재회를 기뻐하면서 지금도 당구를 치고 있느냐는 질문에 “당구는 남편 다음의 인생 반려자”라면서 미국식 상업주의의 허슬러 당구 풍토를 개탄했었다. 이 가쓰라 집안 얘기를 하면서 나 개인적으로 꼭 한가지 전하고픈 것은 「매사가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이다.  

두 자매는 누구보다도 비극적 환경의 주인공들이었다. 조실부모한 탓에 어린 시절부터 형부인 고오바시가 양육을 전담했고 나이 어린 처제들에게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버팀목으로서 큐를 들게 했다고 한다.
기왕 시작한 것이면 철두철미, 완벽함을 기하는 게 일본인의 근성. 두 자매의 당구교습은 형벌이나 다름없게 혹독했다고 전한다. 한 예로 가준점수를 한 큐에 쳐내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았다는 고오바시의 실토다.
그 당시 두 자매의 라이벌로 아마다(天田章), 후지하라(藤原), 야마다(山田) 등 당구명인들이 있었지만 거의 모두가 이들과의 겨룸에서 나가떨어졌고 개중에는 대결을 기피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한국인 고점자 방용하의 세리 묘기  





여류당구가족 가쓰라(桂) 자매의 내한 시범 경기는 이후 일본 고점자들의 방한 길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아마다(天田), 후지다(藤田) 등 당대 명수들이 다투어 경성(서울)을 찾아들었고 이들의 수준 높은 기술 당구는 상대적으로 국내 팬들의 시야를 열게 했다.

일본인들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외래 문화 내지 풍물을 자기 나름대로 건전하게 정착시키는 강한 내셔널리즘이다. 잘 알다시피 바둑만 해도 그 기원은 고대 중국이었으나 이를 기도(棋道)로서 발전시켜 오늘날엔 그 종주국이 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당시 일본 고점자들이 보여 준 당구정신은 완전히 아마추어리즘의 본보기였다. 때문에 이들의 한국 나들이는 당구기술의 고급화 못지않게 우리 당구가의 건전기풍 조성에 큰 힘이 됐었다. 실로 30년대 중반기의 이때부터 이후 태평양전쟁 발발까지의 비교적 짧은 기간이야말로 지금까지 우리 당구사의 가장 멋지고 모범적인 한 세대였다.

풍토가 비옥하면 자연히 열매도 풍성하게 맺게 마련이다. 많은 지도급 당구인들이 이때를 전후해 나타났는데 오늘의 원로당구인 중 대다수도 바로 이 시기에 큐대를 잡았던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명성과 인품을 함께 했던 몇 사람의 고점자들을 소개한다.

이 시기 가장 멋쟁이면서 인텔리층의 당구 명사라면 당시 미쓰꼬시(三越) 백화점의 간부사원이던 방용하(方龍河)씨가 첫 손가락으로 꼽힌다. 해방 후에는 동화백화점 지배인을 지낸 그의 당구실력은 3백점(지금의 1천점)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 정상이었다. 그러나 점수 이상으로 그의 테크닉의 진면목은 세리(Seri) 기법의 일인자라는 것.
세리 당구란 공은 한데 모아 놓은 채 쿠션을 따라 이동하면서 계속해 득점하는 방법으로 당구기술 중에서도 가장 고도의 기법이다. 이 세리 기법을 마스터하면 일류 중의 일류 당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북 청진이 고향인 그는 북쪽 사람답게 고집스런 기질로 승부욕이 강했다. 특히 일본인과 겨룰라치면 단 한 판도 지지 않아 젊은층들의 우상이었다. 당시 충무로 일대 일인촌의 고점자는 총독부 직원 다까끼(高木)와 하라 변호사가 쌍벽이었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도전했으나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이 방용하씨와 싸워서는 10전10패, 마침내는 역부족을 자인해 대결을 꺼려했다고 한다. 종로2가 현 YMCA 맞은편에 자리했던 중앙당구장이 그의 무대였고 퇴근 후면 거의 살다시피하며 후배 지도에 전념했다.
60년 초에 세상을 떠났으니 진실로 초창기 우리 당구 발전의 기둥이었던 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이분에게 가르침을 받은 바 있고 8·15 후에는 서로 대등한 실력에서 격의없이 어울렸던 것이 지금도 선명한 추억이 돼 남아 있다.

이 밖에 박수복(朴守福·일승정구락부 사원), 권재덕(한전 운전기사), 조정일(가방전문상), 배상아(교사), 이택(양복점), 이규황(화가), 박용준(서울연와사장), 홍사철·지윤옥씨 등이 이 시기 경성의 고점자들로 명성을 떨쳤고 지방당구인으로는 대구의 최운영씨, 인천의 조성철씨 등이 모두 3백점대의 정상급들이었다.

이 중 지면관계상 좀 특이했던 세 사람만을 다시 소개하면 먼저 이규황씨로 이분은 메이지대 출신의 미술청년이었다. 그 시대 엘리트로서 귀공자 타입의 그는 당구의 멋을 알아 본 지식인이었다.
나에게 당구를 가르쳐 준 첫 번째 스승이 바로 이분이었다. 치밀 섬세한 테크닉이 절대로 실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전공인 그림보다 당구를 더욱 사랑했던가 싶어 안타까움도 없지 않다.

배상아씨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 배재고보의 교사였다. 현직 교사가 당구장을 출입했다면 큰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한때의 우리 세태와 비교할 때 그 엄청난 의식구조의 차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 시대의 당구장은 결코 지금처럼 유흥장이 될 수 없었고 또 교단을 성직으로 억지 미화시키는 그릇된 인식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지윤옥씨인데 그야말로 당구인생의 대표적 인물이다. 전회에 얘기한 바 있는 서린동 소재 홍등당구장의 경영주로 첫발을 디딘 게 17세였다. 이후 화신 옆 동아당구장으로 이사하면서 장안 고점자들의 단골 무대가 되게 했고 그 후에도 스스로 대도시 순회 시범에 나서 당구의 지방 확산을 주도했던 현대 당구의 증인이었다.
다른 당구인들과는 달리 거의 천부적 소질로 일본 최고봉이던 아마다·후지다를 스승으로 한 점도 그만의 자랑이겠다. 그의 특기는 마세(Masse) 기술이었다. 이 기법에선 아직까지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이 지씨와 연관된 사실로서 한때 그는 청와대 직원들의 당구지도를 맡았던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으나 60년대 초 혁명 직후 청와대에도 2대의 당구대가 새로 설치됐다고 한다. 직원들 중에서도 박종규 전경호실장이 2백점대의 발군의 실력이었고, 박정희 대통령도 즐겨 큐대를 잡았는데 대략 1백 50점대의 상당한 실력이었다고 전해진다.  

(사진1) 초창기 한국 당구 발전에 기여했던 분들
          (우로부터 조동성, 강두석, 박군실, 조성철, 조봉호, 송준상, 이준구, 권수동 제씨)
(사진2) 4구 일본선수권자이며 한·일 양국의 당구 발전에 기여한 다까끼 (高木正治 : 한국명 尹春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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