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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 이야기 5
작성자 관리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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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1-02-23 10: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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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790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5


2차대전 나자 전시체제 돌입으로 당구도 사양길  

현지의 선배 당구인인 박수복(朴守福)씨와  함께 봉천(奉天) 시내를  샅샅이 구경한 나는 입학원서의 제출 마감이 임박해서 북경대학을 찾아 나섰다. 기차를 타고 국경지대인 산해관을 통과하면서 느낀 점은 역시 중국은 넓고 크다는 것이었고 큰 물에서 큰 인물이 돼야겠다는 호기가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옛말 그대로 하늘은  무심치가 않았으니 잠시나마 놀이(당구)에  몰두했던 나에게 벌을 내린 것이다. 신원조회가 도착되지 않은데다 모교의 추천서마저 제대로의 양식을 구비하지 않아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만주에서 도중하차만 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재수속을 할 수 있었을 것을  후회막급이었다. 별수 없이 대학문을 되돌아 나올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 길로 천진(天津)으로 달려갔다. 당시 천진은  프랑스의 조계권(租界圈)이었고 서양문물이 가장 먼저 닿았던 곳이니 기왕지사 시야라도 넓히겠다는 속셈에서였다.
과연 듣던 바 그대로 인종과 국적에 차별이 없는 자유천지였다. 우선 시가지의 건물 모습부터가 완전히 서양식으로 꾸며져 이국정취가 물씬했고 난생 처음 보는 온갖 진품들이 넘쳐 있었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오직 당구대였다. 여기서 이틀간 체재하면서 오직 당구장 견학만이 전부였다. 국제도시란 성격답게 이곳의 당구대는 모두  포켓당구대여서 로테이션 게임의 진미를 처음으로 맛보게 됐다.

귀로에 다시 신경(新京)에 내린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철부지의 어리석음 탓이었다. 당초의 상아탑 유학은 딴전인 채 시종 당구 유학 길이 되고 만 것이다. 번화가에 자리한 국옥(菊屋)당구장이 기억에 남는데 때마침 일본의 명수 후지다(藤田)가 시범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큐대만으로 땅바닥의 공을 당구대까지 끌어올린다든지, 맥주병 위의 공을 미동도 없이 때려 맞히는 등의 점프 묘기는 운집한 관중들을 완전히 매료시켰고 일부 돈 많은 호사가들은 즉석에서 찬조금을 뿌리는가 하면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며 사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같이 나의 당구수업도 꽤나 다채롭고 그만큼 광기가 있었다고 봐야겠다. 한 가지 일에 심취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매력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 그것이 지독한 아집이 돼 후회도 남길 수가 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얼빠진 중국행이 있은 그 해 말께 전황이 점점 급박해지자 일본은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생활 전반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비상 긴축정책이었다.
스포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체의 행사가 금지된 가운데 모든 구기 종목이 동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당구장만은 폐쇄를 면했다. 대신 영업시간을 줄여 하오 5시부터 밤 11시까지의 반나절 장사였다. 이런 조치는 당연히 당구장수를 줄어들게 했고 서울시내의 경우 30여 개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시설이 부족하니 한번 큐를 잡기에도 순번을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아마추어들에게는 안치면 그만이겠으나 우리 같은 당구인생들에겐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기다리진 않았으나 아무튼 각 당구장 앞은 지금의 영화관 앞처럼 열을 지어 서있는 진풍경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당구요금도 시간제 계산 방식이 됐고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 이전까지는 승자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게임에 참가한 전원이 요금을 내되 시간에 제한 받지는 않았다.
이 시간제 요금 방식은 당구 본연의 스포츠십을 외면케 한  결정적 원인이 됐다. 훗날 당구장이 사교장이 아닌 유흥장으로 전락된 것도 바로 이 시간제 요금 방식의 출현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듬해인 1944년 들어 이미 패전을 피부로 느낀 상황에서 그저 살아간다는 것만이 소중했으니 생활의 유락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갔고 나도 학도지원병이 돼 일본 니이가따의 보병사단에 들어간 후 종전까지 생사를 헤맸다.

해방이 돼 그간의 일본 거류민들이 쫓겨감에 따라 당구장도 적산(敵産) 가옥의 하나로서 속속 헐값에 물려졌다. 세상 만사가 그렇듯이 이때도 진실된 당구인은 돈이 없어 그저 남의 집 불구경 격이었고 상인들만이 장사속에서 제세상을 만난듯  마구 탐욕을 부렸다. 사실상 이때부터 더 이상 상아공의 기풍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됐다.

곧이어 미군 진주와 함께 이른바 양풍이 밀려드니 사교장으로서의 당구장은 차츰 빛을 잃기 시작했다. 다방과 술집·댄스교습소가 불어나면서 중심가의 당구장을 마구 잠식, 진고개(明洞)와  종로통의 기존 일류 당구장들이 속속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같이 사양화의 길을 걷는 가운데 해방은 많은 해외 당구인들을 한꺼번에 불러들여 당구인층이나 기술면에서는 점차 최고의 황금기를 맞게 됐다. 이때의 해외 출신 당구인사들을 몇 사람 꼽아 보면, 만주에서 온 원로 박수복씨를 비롯해 일본에서 국가대표선수로 묘기공의 일인자였던 최용(崔鎔)씨, 상해파(上海派)로는 김창섭(金昌燮), 김정환(金正煥)씨 등이었다. 이 중 김창섭씨는 당구 외에 훗날 국내 왈츠춤의 왕자로서 항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같은 상해 출신의 김정환씨는 골프를 국내에 소개한 개척자가 됐다.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대용품 시대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8·15 해방은 순수 우리 힘에 의한 국권 회복이 아니었던 데서 한동안의 혼란상태가 불가피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미군정 기간은 구전통과 새 양풍(洋風)과의 격렬한 싸움판이었고 그것은 모든 면에서 자아가 상실된 단절의 시대였다고도 볼 수 있다.

종래의 사교장이던 당구장이 술집이나 다방, 댄스홀로 변신하는가 하면 상아공 자체가 차츰 그 품위를 잃기 시작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었다. 이런 가운데 해방 전까지 30여개에 달했던 서울시내의 당구장수는 불과 1년도 못돼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더욱 서글픈 일은 과거의 당구장(구락부) 주인들은 순수 당구인이었던데 반해 새 경영주들은 장사속의 사업가가 대다수였던 점이다.

그러나 이런 풍토의 변화 이전에 우리 같은 진골 당구팬을 가장 직접적으로 괴롭힌 것은 당구재료난이었다. 이때까지의 당구재료는 모두 일본제였다. 해방과 동시에 수입선이 끊기자 일체의 재료가 동이 나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당구장은 있어도 당구대가 없어 큐를 들 수가 없었다. 궁측통(窮則通)이라, 궁하면 통하는 법, 다행히 미군 군수픔이 무진장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서 대용품을 찾게 된 것이다. 깔개인 라사는 미제 담요를 재봉틀로 박아서 대신했다. 팁은 군화의 바닥창을 오려 사용했고 초크는 백묵을 대신했다. 이것마저 입수가 어려워 한동안은 제각기 사용분을 휴대하고 다녔던 적도 있다.

문제는 당구공(상아공)인데 이것만은 대용품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끼고 아껴 사용했지만 몽땅 곰보 투성이가 되었다. 구르는 소리는 마치 자갈밭을 지나는 달구지처럼 요란했다. 아무튼 얼마나 당구용품에 지쳤든지 단골팬이나 고점자가 아니면 처음부터 입장을 기피할 정도였고 당구대 한 대에 큐 한 자루씩이 고작이었다. 이같은 재료난은 한동안 지나 미군 PX를 통한 새 수입 통로가 뚫리면서  완전히 해소됐다.

해방 직후 서울시내 당구장으로서 가장 각광받은 곳은 국민은행 뒤쪽에 자리했던 「낭화헌」일 것 같다. 원래는 일본인 구락부였으나 한국인이 이를 인수해 장안 고점자들의 당골처가 되었다.
여기에 모였던 얼굴로는 국내 최고의 고점자(5백점)로 동화백화점 지배인이던 방용하씨를 비롯해 원로 박수복씨, 나와 혜화전문 동창생인 최기창, 김명호(金明鎬), 장수복(張壽福),  이한종(李漢鍾)(당시 휘문고 야구 코치), 해외에서 귀국한 김창섭, 김정환,  최용씨 등 모두 당대의 정상 당구인들이었다.

당구대라야 단 3대 뿐이었으니 게임보다는 시국담이 일쑤였고 그런 점에서 이 낭화헌당구장은 우리 당구인들의 사랑방이었다. 특히 내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이곳에서의 모임에서 앞으로의 국내 당구계의 발전을 위한 토론이 자주 있었던 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혀 부질없는 망상이었으나 그때만은 모두가 진지했음을 밝혀 두고 싶다. 왜냐하면 이런 모임이  우리 당구계에선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낭화헌은 약 1년 후 다방으로 탈바꿈을 해버렸고 명문 당구장으로서 바통을 이어받은 곳이 서울역 앞 「어성(御成)」이었다. 이때쯤은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당구인들도 제각기 새로운 직장을 찾아나섰는데 나 역시 군정하의 검찰청 공복이 됐다. 그러나 하루 일과가 끝나기가 바쁘게 대개는 당구대 앞에 모여 기량을 겨루면서 우정을 나누는 것이 상례였다.  이 어성당구장에서 홍콩제 플라스틱 공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종래의 상아공보다 한결 가볍게 느껴졌으나 대신 중후한 맛이 없어 고점자들은 상아공쪽을, 플라스틱 공은 초보자들이 많이 애용했다.

1947년 이른 봄 이곳에서 해방 후 최초로 친목당구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약 1백명이 참가해 방용하 선배가 우승, 내가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 해 들어 당구계도 차츰 생기를 되찾으면서 새로운  당구장들이 많이 생겼다. 개업기념의 친선당구대회가 꼬리를 물어 당구팬 홍수의 기폭제가 됐다. 만주에서 온 최용씨가 후배지도를 목적으로 무교당구장을 세운 것을 필두로 소공동에는 대한당구장이 3백점대의 고점자 이춘기(李春基)씨를 지배인으로 맞아 들여 어성의 고점자들을 몽땅 옮겨 받았다.

그 해 11월 충무로 3가의 구 일승정(日勝亭)이 일신정(日新亭)으로 이름을 바꿔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은 훗날 자유당 시절의 국회 부의장이었떤 한희석(韓熙錫)씨였다. 이때만 해도 그는 여느 사업가와 다를 바 없었고 당구실력도 50점대의 초보자 수준이었다. 권력의 날개를 달지 못했던 시절이라 건달패들의 시달림도 받았지만 굵직한 고객들도 많아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무렵 당구인 아닌 당구장 명사가 한 사람 있었으니 주먹왕 김두한(金斗漢)씨였다. 이따금 그가 당구장에 나타나면 특유의 무용담이 쏟아지게 마련이고 그럴 때면 장내가 온통 웃음바다에 빠져들어 공을 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진5>6·25후 초창기 한국 당구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던 당구인들
<사진6>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와 일본빌리아드협호가 공동으로 주관하였던 한·일 친선 당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일본 선수단과 한국측 임원들(왼쪽부터 표재영씨, 고바야시, 4번째가 고모리, 6번째가 다까키, 스미요시, 가쓰라, 필자, 요시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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