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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 이야기 6
작성자 관리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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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1-02-24 10: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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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389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6


6·25전쟁 전후의 황금시대  

군정이 끝난 1948년께부터 50년 6월 전쟁 발발까지의 혼란시국은 한편으로 유락가(遊樂街)로선 최고의 황금시기였다. 너도 나도 모두가 삶의 지표를 찾지 못해 떠돌다 보니 발길 닿는 곳이 그저 유흥가였다. 거리마다 애상조의 유행가 가락으로 넘쳤고 한 잔 술에 시름과 회포가 오갔다.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술집과 댄스홀은 밤낮없이 문전 성시를 구가했다.

당연히 당구장들도 제철을 맞기는 마찬가지여서 당구대마다 불티를 날렸다. 이 시절 나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당구장이 있으니 충무로 2가의 태양당구장이다. 서울시내에서는 가장 연륜이 오래고 1급 당구장으로 명성을 자랑하던 이곳은 하마터면 대포집이 될 뻔했었다.

원래 그 장소는 일제 때의 최고 사교장이던 옛 「지하지가(志賀之家)」구락부(당구장)로 해방이 되자 박성희(朴星熙)씨가 물려 받게 됐다. 지하지가는 내가 혜화전문 재학시절 3쿠션 게임의 단골 연습장이었다.

해방 직후 미처 직장을 갖지 못했던 나는 저녁나절이면 명동 일대의 옛 당구장을 순방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다. 이미 말했듯이 대다수 당구장들이 살롱이나 술집으로 변해 버려 상심이 컸을 때 이 지하지가만은 폐장인 채 한 가닥 기대를 걸게 했다. 그런데 하루는 내부 단장이 한창이어서 반가운 김에 주인장을 찾으니 박성희씨였다.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술집을 차릴 셈이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몇 날을 두고 그를 설득했다. 옛 지하지가구락부의 내력과 명성을 돌려 주고 앞으로의 전망 등을 사뭇 애원조로 얘기한 끝에 간신히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질없는 방해꾼이었으나 훗날 그런 대로 영업이 번성했으니 다행스럽다.

태양당구장도 개업기념 당구대회를 개최했는데 한 가지 특기할 사실은 1백여명의 참가선수 중 단 한 명 홍일점 여성이 들어 있어 장안의 화제가 된 일이다. 외국에서는 여성 고점자들이 많으나 국내의 공식 대전에서는 이때가 처음인 듯싶다. 화제의 주인공은 샹하이에서 귀국한 이정숙씨(당시 25세)로 직업은 미용사. 아마추어로서는 수준급 실력이었으나 프로들을 당할 수 는 없어 중반전에 탈락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당구계의 아마추어리즘은 그대로 지켜졌는데 우승자에 대한 시상품이 그 좋은 증거였다. 5돈중짜리 순금 반지나 마카오 양복지 한 벌 또는 쌀 1가마니가 주어졌지만 자축연의 한턱 값이 상품값을 휠씬 능가했다. 서울시내의 당구 붐이 절정을 맞은 48년도 봄 나는 시범 초청을 겸해서 지방 당구계를 순회한 적이 있었고 서울보다 오히려 지방 도시들의 당구열이 높은 데 놀랐다.

원로 당구팬들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 시절 각 도시의 대표격 명문 당구장들을 몇 곳 되돌아본다. 그 중에는 지금도 지역 당구계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곳이 있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인천의 대표 당구장은 왜정 때부터의 동지(同志)당구장이고 그곳의 최고점자는 조성철(趙成喆)씨와 이의선(李宜善)씨로 각각 5백점대 실력이었다. 당구인 이의선(李宜善)씨의 수난일화를 잠시 소개하는 것도 한 시대상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된다. 그도 한때 당구장을 경영했지만 이는 지난 24년간의 공무원직을 정년퇴직한 연후의 생계 수단이고 그 역시 나처럼 당구를 지독하게 즐겼던 한 사람의 당구인이었다. 5·16 직후 그는 서울 북부세무서에 근무했는데 당구를 잘 친다는 소문 탓에 강원도 묵호로 전출 당해야 했다. 예기인즉 혁명 후 한때 관기숙정(官紀肅正) 바람이 불었고 공직자가 당구장을 출입한다는 것이 인사고과표에 치명타가 됐다는 얘기다. 직속 상관이 그를 면담, 품위(?)를 지켜 당구를 중단하지 않겠느냐, 아니면 지방 전출을 당하겠느냐 양자 택일하라고 으름장을 놓게 되자 강골파인 그는 후자 쪽을 택해 1년 반 동안 억지 타향살이를 감수했던 것이다. 이제는 흘러간 한 시국의 일화겠으나 그의 수난은 우리 당구인으로서는 뼈아픈 일화로 새겨지고 있다.

항도 부산 지방은 국제도시 성격인 만큼 당구장 시설도 일찍부터 전국 제일이었고 이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당시는 남포동 일대가 중심지로 「초향」과 「백홍」 두 당구장이 쌍벽이었다.
대구는 「동지」와 「상아」당구장, 대전은 「역전」당구장, 청주는 「시민」당구장이 발군격이었다. 청주서는 하건홍(河建弘)씨가 3백점대로 지방유지였다. 이 밖에 군산의 「군산」당구장에서는 이완근(李琓根)씨가 역시 3백점대의 실력을 자랑했고 경기지방에서는 평택의 「녹원」당구장이 유명해 서울 고점자들의 원정이 잦았다.

그 후 6·25전쟁으로 서울 시내 당구장 대다수가 불탔으며 일부 당구인이 월북했다. 그 대표격이 오랜 전통의 어성당구장(서울역 앞)이다. 당구장은 공산치하의 인민군 거점이 되었고 주인마저 꼭두각시가 돼 북을 택했다. 1·4후퇴 직후의 당구계 무대는 대구, 특히 그 곳의 백홍당구장이 피난 당구인들의 집결장소였다. 나 역시 그 곳을 찾아들렀다가 뜻밖에도 원로당구인 최용(崔鎔)씨의 묘기장사판을 보고 경악했다. 최씨는 과거 일정 때 일본 대표선수로 선발된 적이 있고 한동안은 만주 당구계를 휩쓸며 만주 괴뢰국 황제였던 부의(溥儀)의 개인적 당구선생을 지낸 분이다.
난세를 만나 우선 먹고 사는 게 급선무일 테지만 왕년의 당구왕이 공치기 기술로 관람료를 얻는 데는 연민을 느껴야 했다. 이때 그는 40∼50여 가지의 묘기공 테크닉을 펼쳤고 이를 구경한 당구팬들은 즉석모금으로 그의 어려운 피난살이를 도와 주었다.



<사진7>우리나라 당구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던 한·일 친선당구대회가 열렸던 장충체육관과 게시된 대회 간판
<사진8>한·일 친선당구대회에서 대회 삼판장으로 경기 주의사항을 발표하는 필자


 

당구야화1  

[항일운동 비밀결사 아지트 서울 광교의 무궁헌당구장]


1924년 일본의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임정호씨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광교통 네거리에 무궁헌(無窮軒)이라는 당구장을 개설하였다. 이 한국 최초의 한국인 당구장은 허름한 목조건물 2층에 당구대 2대의 빈약한 시설이었지만, 기품과 격조에선 그때까지의 일인당구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당시 식민압제하의 억눌린 민족감정은 무엇 하나 왜놈들에게 처질 수가 없었고, 이런 경쟁의식은 일종의 반항 컴플렉스였다고도 하겠다. 우선, 무궁헌이란 이름부터 나라꽃을 상징해 자주의식을 담았던 것이다. 실제 이 무궁헌당구장은 암암리에 학생운동 연락처로서 이용됐다.
초창기의 당구인들은 모두가 상류층의 젊은 엘리트들이었고 당시 엘리트라면 전문대학생이나 동경유학생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당구장을 비밀 아지트로 삼게 되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구장은 위락시설인만큼 누구나 출입이 자유로운데다 그만큼 당국의 감시가 약했기 때문이다.



[김효근 종로서에 잡혀 윤치호·유진오씨도 출입]


이때 무궁헌당구장에 자주 얼굴을 비추었던 명사 중에는 윤치호, 유진오 두 분 선생도 끼어 있었다. 물론 당구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곳에 나타나는 동창이나 뜻있는 선후배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런 사실이 들통나서 연락책이었던 김효근씨가 종로서에 잡혀가 약 2개월간 심한 고문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맘때쯤 서울에만 국한돼 그 숫자도 한두개를 헤아리던 순수 한국인 당구장이 본격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무궁헌당구장이 개장된지 1년 후인 1925년께부터였다. 주로 종로 1,2가를 중심으로 인사동, 낙원동 일대가 본거지를 이루었는데 동아(2대), 중앙(4대), 테이라(1대) 등이 선두 그룹이었다. 특기할 사실은 포켓당구대가 동아에서 맨처음 설치되어 인기를 모았다는 점이다.


[상업당구장 안착되고 거상·귀족 선호폭 넓어]


차츰 상업당구장이 안착됨에 따라 고객층도 다양해져 사각모의 최고 지식층 외에도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체 등 호상(豪商)들과 일제하 작위 집안의 귀족 자제들도 어울렸는데 이색인물 중에는 이완용과 박영효의 손자도 있었다. 비슷한 또래의 두 귀공자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150점대의 고점자였다고 한다. 이완용은 구한말 역사의 오점을 찍은 장본인으로 이른바 ‘을사오적’의 으뜸 인물. 그 후 그의 후손이라면 상당한 저항감을 불러 일으킬 만한데도 당자의 인품이 이를 용훼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고 오히려 그 세련된 매너가 주위의 선망을 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초기 보급단계 한인당구장을 즐겨 찾고 게임 품격을 높였던 선배 당구인들의 모습을 꼽아 보면 우선 당구가족이었던 음악가 홍난파씨 일가를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이 당시 홍난파 선생은 종로3가에서 바이올린 강습소를 열고 있었고 그 옆에 종로당구장이 자리해 퇴근 후면 대포집을 찾기에 앞서 먼저 큐대부터 잡아 하루의 피로를 씻었다고 한다. 선생의 당구 실력은 120점(오늘날의 300점대)이었다.

그런데 친조카인 두 형제가 그에 못지않은 당구팬이었다. 이분들은 모두 의사로서 형 재유씨는 안과, 동생 사유씨는 이비인후과 전문. 지금은 재유씨가 제천에 살고 있어 형제가 떨어져 있으나 당시는 모두 종로통의 명문 개업의였다. 숙부인 난파 선생을 필두로 형제분이 똑같이 당구에 심취해 그야말로 당구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특히 재유씨는 셋 중에서도 가장 열성파였던 것 같다. 얼마나 당구를 좋아했던지 아예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간호원이 달려와 밀쳐내야만 마지못해 큐대를 놓았다고 한다.

원로 영화감독 안종화씨와 그 시대의 최고 스크린 액터 나운규씨도 빼지 못할 당구인으로 실력은 각각 60점(현 200점)과 40점의 보통수준이었다. 특히 나운규씨는 평소 말이 없기로 유명했는데 당구대에서도 시종 침묵일색이어서 그와 한번 상대한 사람은 그 엄숙함에 질려 다시 어울리기를 기피했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저명당구인과는 달리 순수 당구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고점자들로는 서정원, 김효근씨 등이 있었고 이들의 점수는 3백점으로 한국인으로는 최고점이었다. 참고로 이때 국내 최고점자는 후꾸도꾸 무진회사 사원이었던 일인 다까끼로 그의 점수는 5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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