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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남기고 싶은 당구 이야기 4
작성자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1-02-25 10: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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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377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4


혜화전문 시절의 당구수업  

어떤 분야에 남보다 깊이 정통하게 되면 ‘전문가’라고 불린다. 이 호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스포츠 세계에서만은 이 전문가란 말이 있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스포츠는 기술보다 정신이 앞서야 하고 그런 마음가짐은 곧 노력과 연습량으로 돋보여지기 때문이다.

당구도 분질이 스포츠십인 이상 이 점은 마찬가지여서 ‘당구인’은 있어도 ‘당구전문가’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당구인’을 ‘당구전문가’로 오인하고 있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른바 고점자들도 결국은 ‘당구인’일 뿐임을 전제하고 나의 당구이력을 잠시 간추려 본다. 이는 나의 얘기이기 전에 그 시대를 살았던 당구인들의 모습을 대신하기 위해서고 한편으로 이것이 고점자 당구인들의 남다른 수업이었던 것 같아서다.  

내가 처음 당구장 구경을 하기는 1937년 중학교 1년 때 선친과의 동행에서였다. 무역상을 경영했던 우리집은 일본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때문에 비교적 신식 문물과의 접촉이 쉬웠던 것 같다. 선친의 당구실력은 1백점 내외로 즐긴다기보다는 거래상의 교제출입이 많았다. 그러나 우연히 상아공을 보게 된 나는 그 순간 완전 매료되어 그때부터 단 하루라도 당구대를 보지 못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외동아들이다 보니 다른 아이들보다는 용돈이 비교적 풍족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으나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스러울 만큼 심취한 듯 싶다. 아무튼 날이면 날마다 방과 후면 당구장행이 일과였고 실력이 향상될수록 더욱 묘미를 느껴 시체말로 광(狂)이 됐다. 잠자리에 들면 천장이 당구대로 비치는가 하면, 밥상 앞에선 식기들의 배열이 당구공인양 젓가락으로 각도를 재기에 바빴다. 그뿐이랴. 마침내는 수업시간에도 이따금 당구 생각에 몰두, 급우들의 머리로 꺾임각을 계산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당시만 해도 당구장 분위기는 최고의 사교장 그대로였기에 이따금 출입하는 꼬마들을 오히려 귀엽게 여길 정도였다. 사실 나 같은 중학생 당구팬도 적지 않았으며 같은 반에도 서너 명이 단짝을 이루기까지 했다.  

5년이 지나 졸업반이 됐을 때 나의 실력은 1백점대(현 3백점) 중상급이 됐는데 그 동안 이미 말했듯이 방용하(方龍河), 이규황(李奎滉)씨 등 선배 당구인들의 지도가 크게 주효했다. 물론 나의 당구장 출입을 집안에선 알고 있었지만, 크게 탓하지 않았던 것은 무슨 일에나 집념을 가져야 한다는 가풍 못지않게 그 시대가 당구의 신사도를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꼭 한번은 된통 혼줄이 나야 했는데, 전문학교 입시 결과가 발표되던 날이었다. 당시 내가 지망한 혜화전문 문학부의 경쟁률은 30명 정원에 무려 16대 1이었다. 아무리 당구에 열중했다지만 역시 학생에겐 면학(勉學)이 본분인 이상 나는 공부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아니 당구에 뺏긴 시간을 보충하기 위해서도 남보다 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그러나 워낙 입시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시험은 잘 치렀으나 합격 여부가 불안스러웠다. 이날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게 되자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격이 될 수밖에. 곧장 당구장으로 달려가서는 그간의 조바심을 흠뻑 씻어냈다. 주인을 상대로 낮 12시부터 큐를 잡아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12시가 지나서였다. 그때까지 대문간에 지켜 서 계셨던 선친은 내 덜미를 잡자마자 밤새껏 치도곤이가 되게 매질하셨다. 당구장행보다도 외동아들이, 그것도 합격 발표날에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게 몹시 노여우셨던 것이다.

일단 전문학교생이 되고부터 나의 당구취미는 무제한의 자유 속에서의 생활 그 자체였다.
당구지우(撞球知友)로서 동문의 최기창(崔基暢)씨를 만나게 된 것도 큰 기쁨이었으며 이후 우리 두 사람은 대학가의 당구를 주름잡았다.

2학년이 되면서 3백점(현 1천점) 정상에 오른 나는 당시로서는 최연소 고점자였다. 4구식 게임에서 최고기술인 세리 당법은 물론이고 특히 3쿠션에선 라이벌이 없었던 것 같다. 사각모 시절의 추억 중에는 각 대학별 대항 경기에서 연전연승, 매번 말술을 대접받던 일도 빼놓을 수가 없겠다. 그 당시 대학가라야 경성제대(京城帝大)와 연전(延專), 보전(普專), 치전(齒專), 세브란스 의전(醫專), 그리고 우리 혜전(惠專) 뿐이었지만 학생들의 당구열은 지금보다 오히려 강한 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적 게임의 고급 놀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학당구전이 벌어질 때 경기장은 매번 초만원. 응원단도 대단했지만 일반팬들의 관람이 더 많았던 것은 지성인들의 모범경기라는 데 매력을 느꼈다고 봐야겠다. 머리 좋은 경성제대가 유일한 강적이었지만 최기창씨와 나의 커플엔 떡이나 다름없었다. 이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로는 풍문장(馮文章) 교수(중국어)와의 한판 겨룸이다. 그는 강의를 끝내기만 하면 학생 중에 당구치는 사람이 있는가를 묻곤 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선생의 실력을 묻자 1백 20점(현 3백점대)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생들은 나를 지목해 우리 교실에는 3백점 고수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자 그는 믿기질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 며칠 후 퇴근길에 교수가 예의 당구장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의 1백 20점 실력은 동경 유학 시절의 본바닥 점수였기에 상당한 수준이었으나 나에게는 적수가 못되었다. 대결이 끝난 후 교수님은 나를 친구 삼아 주점가를 돌았으며 이후에도 기회 있는 대로 좋은 당구인이 되기를 격려해 주셨다.


 

일본과 중국으로의 당구 나들이  

생각해 보면 나의 당구수업은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은 것 같다. 일부러 당구만을 목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해외여행은 결과적으로 외국 당구장을 순방한 격이 됐고 외국무대를 돌아본 이 체험이 기량 향상의 알파 요소였음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외국행은 혜화전문 2학년 때의 겨울방학을 이용한 동경 구경이었다. 지금은 머나먼 현해탄이지만 그 시절의 일본땅은 비교적 내왕이 자유로웠다. 보다 넓은 세계로 시야를 열어 주기 위한 가친의 배려가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게 만들었으나 1주일여의 동경 체재는 한마디로 ‘당구계 시찰’이었다. 이 당시 동경에는 약 2천여개의 당구구락부들이 그야말로 문전성시의 붐을 맞고 있었는데 그 중 20여개 이상을 순방했으니 나의 당구 광기도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일본 당구장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우선 깨끗함에 질렸으며 이런 청결함은 당연히 사교장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인 실력은 그다지 월등하지 않아 대개가 아마추어들로 그냥 즐기는 정도였다. 간혹 고점자들을 만나 대결도 해봤지만 나 같은 3백점대 실력자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실전에서 느낀 점은 우리 당구가 순전히 연습에 의한 경험 당구인데 반해 일본은 계산법에 의한 정석 당구로 특히 기본기가 충실한듯 싶었다.

이 학생시절에 겪은 일본당구계 견학은 두 가지의 멋진 성과가 있었다. 그  하나는 앞회에서 말한 일본의 당구명가 가쓰라(桂) 일가와의 상봉이고 다른 하나는 쿠션 계산 책자의 입수다. 유명한 가쓰라구락부는 당시 긴자(銀座3町目)에 위치했고 자매 중 동생인 노리꼬(典子)씨와 해후, 오래도록 친분이 이어졌다.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갓 30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역시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아니 실력도 실력이지만 섬세한 손길이 상아공을 겨냥할 때의 그 모습은 젊은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3쿠션 책자란 당시로서는 우리 당구인들에겐 매우 생소한 이름이었다. 당구에 관한 책자가 많이 나온 지금에도 이 책만은 역시 뛰어난 지침서였다. 하물며 그 시절엔 이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내용은 각 공의 위치에 따라 쿠션 포인트를 이용한 3쿠션치기의 꺾임 계산법인데, 한마디로 포인트 보는 법을 공식화시킨 해설집이었다. 당시 일본내 3쿠션 당구법의 최고봉 마쓰야마 긴레이(松山銀嶺)가 직접 쓴 이 역작은 현재까지도 당구기술서 중의 교본으로 3쿠션 수업자들에겐 가히 필독의 원전이다.

내가 이런 쿠션 계산책이 있다는 사실을 안 것은 3백점대에 올라 그간의 보통 크기 중대에 점점 싫증을 느끼고 충무로 쪽 일본인촌 구락부에 출입하고부터였다. 내가 그쪽의 대대에 익숙치 못해 쩔쩔매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정확한 각도로 수준 이상의 실력을 보였다. 연유를 알고 본즉 바로 이 전문서적을 통한 각도계산이었다. 온 장안을 헤매다시피 뒤졌으나 입수하질 못했고 동경에 닿자마자 최우선 선결과제로 책을 구입했던 것이다. 바둑도 그렇듯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연후에는 반드시 이론적 뒷받침이 병행되어야 다음 단계의 벽을 뛰어넘을 수가 있다.

이 일본행이 있고부터 틈나는 대로 국내 각지의 당구장도 여행삼아 찾아봤는데 남쪽보다는 이북이 저변인구나 기술면에서 보다 우위였었던 것 같다. 특히 평양, 북청, 함흥, 청진 등지가 각기 한바닥을 이루고 있었으며 3백점대 이상의 고점자도 많았다.

이 중 평양은 마치 안방을 드나들듯이 하루길로 나들이한 적도 많았으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창경원 벚꽃이 만발할 때쯤이면 모란봉 벚꽃도 꽃순을 열어 대략 1주일쯤 늦었다. 이 때부터 꽃길 따라 당구원정을 가면 현지의 서문통당구장이 주전무대였다. 실력을 떠나서 평양 젊은 패들의 호기(豪氣)로 봄밤이 온통 술에 젖곤 했었다.

두 번째의 외유인 북경행은 동경 때와는 달리 순전히 진학 목적의 여로였다. 이때가 내 나이 20살 되던 1943년 여름. 그 이전 혜화전문 3년을 졸업하자 선친은 일본 유학 대신 중국을 권했고 이에 따라 북경대학 문학부를 지망해 원서를 제출하기 위한 행차였다.

서울을 하오 6시 반에 떠난 만주행 특급 희망호가 봉천(奉天)에 닿기는 이튿날 하오 4시 반. 기차가 멎자마자 그 길로 청엽구락부(당구장)에 직행한 것은 이곳에 선배당구인 박수복(朴守福)씨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경 때와 마찬가지로 외국인과 겨뤄 보고픈 젊은 패기가 작용한 중도하차였다. 아무튼 낯선 이역에서 평소 친숙했던 박선배를 만난 반가움이란 대단했고 3일간을 머물며 당구장과 술집 명소들을 찾아 쏘다녔다. 봉천 시내에는 약 50여개의 당구장이 있었으며 대다수가 일본인들의 경영이어서 시설이나 격조 모두 손색이 없었다.

그곳 당구고객의 국적 비율은 1할 정도가 중국인, 2할이 한국인이고 태반이 일본인들이었다. 게임을 관전하며 재미있게 느낀 것은 당구대 위의 제각기 다른 국민성이었다. 일본인은 쉬운 공부터 치되 섬세한 반면 스케일이 적어 모험성이 없었고, 한국인은 실속보다 과시 위주면서 사내답게 투기적인 당법이고, 중국인은 물론 실력도 뒤졌지만 지더라도 대국적으로 게임보다 분위기를 즐기는듯 싶었다.


<사진4>1970년대의 당구인들, 앞줄 왼쪽부터 강두석, 이의선, 조동성, 최기창, 서정찬, 전화영씨. 뒷줄 왼쪽부터 홍순면, 이상천, 정정우, 김명석, 박병문, 김동수, 김용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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