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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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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내가 본 당구사 2
작성자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1-02-28 10:2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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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191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8


 

내가 본 당구사 2  

Ⅰ. 상류 사회의 당구 보급


당구가 이왕실에서 실내 스포츠로써 애용되고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1920년에 조선총독부의 직원용 휴게실로서 지금의 남산 입구(현 여성회관 부근)에 경성구락부(대지 약 2천평에 2층 건물)를 세웠다. 이 경성구락부는 1층에 일반직원용 3대, 2층에는 고등관용 2대를 설치하였다.
또 이 외에 서대문 전매청 앞에 1대, 지금의 용산 우체국 뒤인 관사촌에 1대, 총독부 옆 왜성대에 3대를 설치하여 총독부 직원들만 이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예과(현 청량리 라이프주택 자리)에 1대를 설치하여 교직원들이 이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른 당구 기구의 수리는 당시 총독부 직원으로 있던 한국인 전상운씨(당시 500점)와 경성구락부 직원 김효근씨(당시 300점)가 맡았는데, 특히 전상운씨는 순중의 당구 코치 직책도 맡고 있었다. 그때부터 당구는 서서히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영업적인 당구장도 등장하게 되었다.
1923년 왜인촌(倭人村)이 있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2가) 방면에 일인이 경영하는 파주정이라는 당구장이 그 시초였다. 당시 『파주정』에는 1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옆에 아하라씨가 경영하는 『지하지가(志賀之家)』에 2대, 충무로 1가 제일은행 본점 뒤 아사이(旭) 당구장에 2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한 게임당 요금은 1인당 5전이었는데 만약 4명이 게임을 했다면 1등 1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3명이 각각 5전씩을 내어 15전을 요금으로 지불하였다. 그 당시에는 백미 한 가마가 3엔이 채 못되었던 때이니 꽤 비싼 요금이었다고 하겠다. 해방 직전에는 1인당 8전씩 하다가 시간제로 받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백미 한 말 값에 해당하는 1엔 20전씩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로 방면에 당구장을 개업하기 시작하였는데, 192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인 임정호씨가 지금의 조흥은행 건너편에 『무궁헌(無窮軒)』이라는 간판으로 개업하여 2대의 당구대를 설치하였는데 주로 일본 유학생들과 그 출신자들이 이용하였다. 윤치호선생이나 유진오 선생 등도 이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자주 왕래하시곤 하였다.

그 후 『광교당구장』, 『종로당구장』이 각각 2대의 당구대를 설치하고 개업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1925년에 인사동 입구에 『동아』(2대), 종로 2가에 『중앙』(4구대 4대, 로테이션 1대), 『테이라』(2대) 등이 개업하게 되는 등 8·15 해방에 이르러서는 서울만 하여도 33개소의 당구장이 개업하게 되었다.

당시 당구장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신분을 살펴보면 일제하에서는 특수 계급층과 작위를 자긴 귀족들이나, 종로에서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 등을 하는 부호들과 자칭 신사들, 그리고 만또를 펄럭이며 4각모자를 쓴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게임이 끝나면 으례히 명월관이나 국일관 등의 요정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금전에는 구애를 받지 않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여유있는 상류층의 한량들이었던 것을 말해 주는 예인 것이다. 심지어는 명월관의 주인 이시우씨도 300점의 고점자였으니 당시의 상황을 누구든지 짐작할 만할 것이다.


Ⅱ. 8·15 해방 당시의 상황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자 일본인들은 귀국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당구장들도 헐값에 양도되어 경영권이 우리 한국인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미군들이 진주함에 따라 우리 땅에도 새로운 문물과 함께 양풍이 밀려 들어왔다. 여자들의 몸빼가 서양치마와 바지로 바뀌고 모든 물건이 배급제에서 미국의 구호품으로 바뀌었다. 거리에는 양품이 활개를 쳤고 이것들로 사람들은 흥청거렸다. 씨레이숀이며 껌 같은 것들도 이때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풍조는 명동이나 종로 등의 번화가를 온통 술집, 다방, 댄스교습소들이 즐비한 사치와 유행의 거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까닭에 자연히 당구는 외면을 받게 되어서, 해방 당시만 해도 33개소의 당구장이 있었는데 하나 둘 줄기 시작하여 20개소에 이르게 되었다. 명동의 『지가지가』, 『동지구락부』, 종로의 『장안』, 『중앙』, 『테이라』, 『종로』 등의 당구장이 모두 술집으로 바뀌고 말았으니 그때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방용하(方龍河)씨와 본인, 그리고 국내의 여러 고점자들은 명동 1가에 있던 『낭화헌(浪花軒)』에 모여 게임도 하고 당시의 사회상황에 관한 시국담도 나누곤 하였다.

해방이 되자, 만주에서 만주국 황제의 당구 개인 코치로 있던 최용(崔鎔)씨(500점, 당시 한국의 묘기공의 권위자), 그리고 김창섭(金昌燮)씨(300점, 상해에서 카바레 경영), 박수복(朴守福)씨(500점, 후에 대한당구협회 부회장 역임) 등의 해외선수들이 속속 귀국하여 국내의 우리들과 합류, 함께 게임을 하면서 앞으로의 우리나라 당구계를 이끌어 나갈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아버님께서 친구분과 게임을 하기 위해 『낭화헌』에 들르셨다가 내가 당구를 치는 모습을 우연히 보시게 되었다. 그때 마침 옆에 서있던 방요하씨에게 아버님은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선수가 누굽니까?”하고 질문을 하셨다. 이에 방선생께서는 서슴없이 “조동성 후배가 단연 제일가는 선수지요”하고 대답을 하시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어디 선배님들도 많고 한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하면서도 기뻐하시는 모습은 완연하셨다. 그 덕분에 물론 그날 집에 돌아가서 영웅 대접을 받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Ⅲ. 새로운 당구업소들의 개업


내가 23세 되던 해인 1946년 1월에 법무부에 취직을 하여 덕수궁 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한창 혈기 왕성한 때이고 마침 광복된지 얼마 안된 때이기 때문에 나도 조그만 힘이나마 나라를 위한 일념으로 분골쇄신 노력을 하였다. 그때도 나의 당구에 대한 정열은 여전하여 퇴근 후면 남대문 옆에 있는 어성당구장에서 당구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때문에 5월에 열린 「어성당구장 주최 친선 당구대회」에 약 5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방용하씨가 1위를 하고 내가 2위를 차지하는 좋은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방용하씨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인 전신 동화백화점의 지배인으로 있었는데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내가 그분에게 세리를 배웠었다.  또한 이곳에서 당구를 치기 위해서 매일 인천에서 상경하였던 조성철씨(300점)와도 이때 친숙히 지냈다.

그후 계속 새로운 당구업소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47년 4월경에는 최용씨가 시내의 무교동 중심가에 『무교당구장』을 개업하고 후배 양성에 나섰으며, 1947년 5월에는 상공회의소 지하실에 당시 국내 고점자 중의 한 분이신 이춘기씨(300점)가 지배인으로 『대한당구장』을 경영하였다.

그러므로 해서 자연히 국내의 유명한 고점자들이 성시를 이루게 되었고, 동년 10월에는 친선당구대회가 개최되어 최석영씨, 김경호씨 등이 입상하였다. 또한 이 해 11월에는 충무로 3가에 『일신정당구장』이 서울 시내에서는 최고대수의 당구대 5대를 설치하고 개업을 하였는데 경영인은 자유당 최고위원과 국회 부의장을 지낸 한희석씨였다. 명동의 전 『지하지가』자리에도 중국에서 귀국한 박성희씨가 『태양당구장』(3대)을 개업하였다.


Ⅳ. 친선당구대회의 푸짐한 상품


이때 당구 애호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있어서 친선당구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준상씨(300점)와 김창섭씨(300점) 등이 입상을 하였다. 당시 각 당구장 친선대회에서는 1등은 부상으로 순금반지(5돈) 또는 양복 1벌이나 백미 한가마 등이 부상으로 주어졌으며, 그 밖의 입상자들에게도 푸짐한 부상이 주어졌다. 항상 그러했지만, 이때도 시상식이 끝나고 입상자들과 대회를 주관했던 분들, 심지어는 관객들까지 합세하여 대연회를 가지면서 당구인들의 단합과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명동 『태양당구장』의 뒤를 이어 명동 2가에 박주실씨가 『마돈나당구장』을 개업하는 등 서울에만 10여개 업소가 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당구 애호인들이 급격히 증가하여 계속 늘어나는 각 당구장에는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그 당시 200점 이상의 고점자들은 몇 사람에 불과하여 서로 상대방의 족보까지 훤히 알 정도로 친하게들 지냈다.

한편 지방에도 당구장이 증가되어 갔는데, 인천의 『동지구락부』, 부산 남포동의 『초향당구장』, 부평동의 『백홍당구장』 등에는 특히 고점자들이 많았다. 대구에는 『도지구락부』와 『상아당구장』, 대전에는 『역전당구장』, 청주에는 『시민당구장』, 군산에는 『군산당구장』, 평택에는 『녹원당구장』 등 많은 지방의 업소가 각 지역의 고점자들과 일반 당구 애호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번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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