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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조동성의 내가 본 당구사 3
작성자 관리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11-03-01 10: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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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5160

출처 카페 > 당구클럽부산 HIGH RUN.. | 빌리맨
원문 http://cafe.naver.com/highrun/579


내가 본 당구사 3  

6·25와 수복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북괴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대규모 남침을 감행하였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도 북괴군은 수차에 걸쳐 소규모의 공격이 있었던 까닭으로 이번에도 그 정도이겠지 하고 모두들 생각했었다. 그러나 국군은 게속 북괴군을 격멸 중에 있으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에도 불구하고 27일부터는 당시 필운동에 있는 본가에까지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신 아버님께서 다음날 피난을 떠나야겠다고 어머니와 피난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데 28일 새벽 이미 북괴군 탱크가 집 앞을 지나가는게 아니겠는가. 할 수 없이 피난을 포기하고 나는 공무원이었기에 당시에 서소문동 중국인촌에 거주하고 있던 풍문장(馮文章) 교수님 댁으로 몸을 피하였다. 교수님은 중국인이었고 그 사모님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나는 안전하게 피해 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9·28 수복과 함께 나의 은신생활도 끝나고 오랜만에 명동의 『태양당구장』에 나가 큐를 잡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불리하게 되어 이듬해 1·4 후퇴의 피난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나도 부모님과 함께 두 동생을 데리고 전가족이 부산으로 피난길을 떠났는데, 대구에서 최용씨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뚜렷한 생활방편이 없었던 최씨는 당구장에서 묘기공 40여 가지를 가지고 시범을 보이면서 손님들로부터 약간의 관람료를 받는 것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일단 가족들을 부산 범일동에 안주시켜 놓고 남포동 2가의 『초향당구장』에서 당구를 하였는데, 당시에 주인은 전병학씨였고, 각지로부터 피난 온 김창섭씨(서울), 김명호씨(서울), 김정환씨(서울), 정호영씨(전주), 하건홍씨(청주) 등과 부산의 고점자들인 김창구씨, 허근씨, 박윤조씨, 강두석씨 등이 함께 모여 도시 대항전격인 편먹기 당구를 즐겨 치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일화


하루는 3쿠션 연습을 하고 있는데 미군병사 5명이 자신 만만한듯 당구를 청해왔다. 나는 그들의 기세를 꺾어 줄 겸 당구에 응해 주었는데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기세가 꺾여 돌아가면서도 그들은 오늘은 컨디션이 나빠서 졌으니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와서 설욕을 할 테니 다시 한번 게임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날이 되어 당구장에 나갔더니, 그들은 웃을 때면 이빨만 하얗게 드러나는 흑인병사 한 명을 데리고 와서 게임을 상대하게 하였다. 그런데 종일을 쳤는데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게임을 중지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알고 보니 그 병사는 동경의 미극동군 사령부에 근무하는 병사로 미극동군 3쿠션 선수권자였는데 오늘의 시합을 위해 전날 비행기로 특별히 공수되어 왔다는 것이었다.


첫 여자 계산원 등장


6·25전쟁 중 피난민들은 경남지방으로 집중되었고 자연히 경남지방의 당구업계에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그때 당구대의 석판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당구기구 일체가 국내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석판만 구하면 새로운 당구대를 얼마든지 만들게 되었다. 1954년에 부산 광복동 2가의 미화당백화점 2층에는 16대의 당구대에 각 당구대마다 1명씩 게임 계산을 봐주는 여자종업원을 고용한 당구장이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서울 명동의 『태양당구장』『명동당구장』에서는 국내의 고점자 뿐만 아니라 연예계의 남인수씨, 신세영씨, 작가 조남사씨, 성우 남성우씨 등이 당구를 즐기고 있었다.


대한당구협회 발족 - 초대 이재학 회장 취임


1955년 11월에 미도파백화점 뒤의 『삼화당구장』에서 뜻있는 당구인들이 모였다. 6·25전쟁으로 인한 당구계의 무질서를 바로 잡고 바람직한 운영을 기하기 위하여 협회를 조직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하게 되었다. 이래서 대한당구협회(大韓撞球協會)가 발족하게 되었다. 초대 회장에는 국회 부의장이었던 이재학씨가 선출되었고, 부회장에는 방용하씨, 홍사철씨가, 이사장에는 이한종씨가 각각 선출되었다.

그 당시 이재학(60점)씨는 같은 자유당의원인 김익기씨(300점), 하태환씨(150점), 정대천씨(120점), 김재황씨(150점), 민관식씨(150점) 정도로 협회 임원들이 모여 게임을 즐기기도 하였다.


첫 행사로 전국 당구대회 개최


대한당구협회는 그 첫 행사로서 1956년 1월 19일, 20일 양일간에 걸쳐 제1회 전국당구대회를 명동에서 개최하였다. 최용씨의 묘기공 시범을 비롯하여 도시대항전, 최고조, A조, B조 경기가 벌어졌는데 국내의 고점자 100여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입상자들에게는 국회의장상을 비롯해서 대회장인 이재학 국회부의장상, 문교부장관상, 보건사회부장관상 등이 수상되어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필자인 나는 최고조경기(1000점조)에 출전하여 승을 하였는데 「대한뉴스」에 우리나라의 최고 고점자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한편 A조(500점조)에 출전했던 최기창 선수는 1회전에서 5회전까지 진출하여 단번치기로 계속 끝을 내는 좋은 경기를 보여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이무렵 가수 남인수씨가 을지로 3가에 『국제당구장』을 개설하였는데 8대의 당구대 중에서 1대가 3쿠션용 대대였다.


붐 일기 시작


충남 보령군에서 석판이 생산됨에 따라 모든 당구기구가 완전 국산화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반인들에게 대한 당구 보급도 널리 확대되어 서울 시내뿐만 아니라 지방의 모든 당구업소들이 호황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호황을 맞자 어디든지 신축 건물만 세웠다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당구장을 개업하게 되어, 2층에 당구장이 있는데도 3층에 또 다른 당구장을 개업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렇게 해서 2년 뒤에는 서울 시내만 하여도 750여개소의 당구장이 난립하게 되었다.


국일 당구장 시설 최고


이 중 대표적인 당구장이  YMCA 뒤의 『국일당구장』으로 20대의 당구대에 20여명의 여자종업원을 두는 당구장을 경영했으며 미도파백화점 5층에는 16대의 당구대를 설치한 당구장이 있었다. 그 당시의 게임으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일화가 있다.


삼화서 밤세워 경기


『삼화당구장』에서 필자는 홍사철씨, 김명호씨, 박세영씨, 최기창씨, 이의선씨 등과 같이 빨간공 20번, 흰공 20번 그리고 다시 빨간공 20번을 단큐에 끝내는 이른바 ‘쟈스트게임’을 아침 11시부터 시작했다. 필자가 제일 먼저 끝났음으로 점심, 저녁 그리고 술까지 한잔하고 당구장에 다시 들러보니 아직도 그 게임은 끝나지 못하고 다들 땀을 흘리며 치고 있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를 보고 귀가했는데 그 게임은 그날로 끝내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연장되어 저녁때 가서야 겨우 끝내게 되었다.


빨간공치기의 유래


요즘 유행하는 빨간공치기는 본래부터 있던 경기방식이 아니다. 『삼화당구장』에서 고점자들이 4구경기에 실증을 느끼고 빨간공치기를 자기 점수의 2할을 놓고 치자, 하점자들이 흉내를 내어 자기 점수의 1할을 놓고 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유행되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http://www.billiard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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